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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시애틀 (8)

by 이병준 2017. 9. 30.

시애틀에 처음 도착한 것이 9월 23일이니까 드디어 미국에 온지도 만 2년이 넘었다. 세월은 정말로 화살처럼 날아가 사라진다. 그 진부한 속담이 뼈속 깊이 사무치게 되면 나이를 먹은 거라던데, 드디어 정말로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새로 배속된 부서는 음성 쇼핑 기술을 개발하는 부서다. 소위 '알렉사' 덕에, 아마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부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원자도 많고, 사람도 그만큼 많이 뽑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서너번씩 면접관으로 뛰어도, 그 가운데 합격자를 보기란 여간 쉽지 않다. 인기가 많은 부서일수록 문턱도 높은 법이다. 그 문턱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 최고의 기술자들과 함께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으니,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문턱은 어느새 조금씩 높아진다. 그러니 그들을 만족시켜 함께 일할 기회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야 마음 넓은 매니저 덕에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존의 '변방' 부서에서 허드렛 일부터 배워가며 이곳까지 오기도 한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일수록 깐깐하기도 그지 없다. 


조직이 급속도로 커지다보니, 한 개 층만 쓰던 부서는 어느새 서너개 층을 동시에 써야 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내가 속한 팀도 예외는 아니라서, 팀원들이 한 곳에 모여 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통 이런 지경까지 되면 부서에 할당된 공간을 늘린 후 자리를 재배치하게 되는데, 덕분에 어제는 짐을 싸버리고 일찍 퇴근, 오늘은 옮겨진 짐을 풀어 정리만 하고 (짐을 옮겨주는 직원들이 따로 있다) 다섯시에 퇴근했다. 내 자리는 조만간 책임 엔지니어로 승진할 거라는 소문이 무성한 능력 좋은 선임 엔지니어 옆 자리다. 보통 능력 좋은 사람이 창가 자리를 꿰 차고, 남은 사람들이 나머지 자리를 나눠 갖는다. 나는 다행히 그 친구 옆이라, 바깥 풍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나이가 들면 신기할 일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아직도 매일 매일이 신기하다. 매일 매일 새로운 사건이 터지고, 새로 배울 것들이 생기고, 새로이 적응해야 할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신기한 것은 내가 아직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 30 초반에 잘나가는 선임 엔지니어가 되어 있는 동료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 의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몇명 없는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며,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나 회의는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조용한 시간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 시간이 많으면 많을 수록, 자기가 가장 잘 하는 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 잘 하는 일을 자주 하면 자신감이 커진다. 자신감이 커지면 버티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