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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나는 왜 44살에 미국행을 결심했나

by 이병준 2015. 9. 10.

23일이면 한국땅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아마존 시애틀 본사에서 일하기 위해서다. 출근이 10월 첫 주 부터니,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잠이 올 리가 없어서, 당연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시차 적응은 잘 될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


내가 9개월 전에 처음으로 14년 일한 대전의 직장을 때려칠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 좋은 직장을 왜 때려치느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이들어 내 인생을 너무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그리고 판교에서 일한 9개월 동안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1) 내가 14년을 보냈던 직장이 인생과 일의 균형을 찾는 사람에게는 '완벽한' 직장이라는 것, (2) 어떻게 하더라도 후회는 하게 되어 있다는 것, (3) 사기업에서의 모든 결정은 결국 다 윗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 (4) 내 인생에 대해서는 최대한 이기적이 될 필요가 있으며, (5) 서울은 절대로 아이를 키우기에 적당한 곳이 못 된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44살에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나? 그런데 사실 그건 또 아니다. 경험삼아 본 시험에 붙었고, 좋은 조건에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는게 전부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몇 가지 지긋지긋한 현실들로부터 잠시 떠나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런데 정말로 그게 전부 다 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냥, 딱히 꼬집어 말할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서,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없는 것 뿐이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라도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런 변화에도 비교적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담력이 늘었나? 아니다. 그냥 무뎌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러가지로 예전보다 훨씬 더 무덤덤해졌다. 1년전과 비교해보면, 이제 나는 무슨 거창한 목표 같은 것도 세우지 않으며, 사명감 같은 것도 없다. 그런 것들을 갖고 살면 인생이 너무 피곤하다. 그냥 하루 하루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 정도나 제대로 고민하면서 사는 게 바람직하다. 그 이상을 내다보기엔 식견도 짧고, 감당할 능력도 없다. 열심히는 살되, 무언가가 되려고 너무 안달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왜 잠을 못 이루느냐고? 판교에서 보낸 9개월의 후유증 덕분이랄까... 새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같은 짓을 '영어로'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공포스러운 것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뉴욕 타임즈에 아마존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들이 잔뜩 실렸던데, 사실 그런 이야기들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대한민국에도 그 만큼 악평을 받을 만한 기업은 차고도 널렸다. 회의 시간에 까이고 우는 개발자 이야기도 나오던데, 대한민국에서도 회의 시간에 임원 눈에 거슬리면 쌍욕 듣는다.


그냥 잘 적응하고 싶다. 잘 적응해서, 향수병에도 걸리지 않고, 미국까지 건너간 사실을 후회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판교에서 보낸 시간 동안은, '내가 이런 걸 하려고 14년 직장을 때려쳤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덕에 잔뜩 열이 받아 있었고, 덕분에 '이런 걸'이라고 폄하했던 일들도 제대로 못 해 냈다. 이번엔 아마 좀 다를 것이다. 계약서에 싸인하는 순간, 내 기존 경력은 전부 쓰레기통에 처 박아 버렸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기술 언저리에서 박사학위도 받았고, 당분간은 그 주변을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런 일들을 못 하게 되어도 상관 없다.


어차피 내 자신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다른 아무것도 못 보게 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