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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시애틀 (1)

by 이병준 2015. 10. 28.

시애틀이라는 도시는 나에게는, 프로그래머의 도시다. 비행기에 오를 때 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프로그래머의 도시라는 것은 좋은 일자리가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좋은 일자리가 있는 도시라는 것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좋은 일자리가 없었다면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리. 한국은 어떤 곳이지?"


이방인으로 시애틀에 온 내게, 가끔 동료들이 묻는다. 영어가 서투른 내가 이 질문에 심오한 답을 해 줄 능력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몇 마디 피상적인 대답으로, 한국이 나에게 어떠했는지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나를 '리'라고 부른다. 


"한국은... 모든 것이 편리한 곳이지."


모든 것이 편리하다는 대답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런 대답에 이른 내 처지를 뒤돌아보면, 미국의 모든 것은 아직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다못해 음료수 하나를 사는 단순한 일을 할 때도 무슨 말을 어떻게 내 뱉어야 할 지 고민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불편하고 어색하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의미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다는 것은, 모든 일이 노동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 노동으로 다가오다 보면, 퇴근할 때 쯤에는 녹초가 되게 마련이다. 어떤 날은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피곤해서, 정말 오늘은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직장이고 생업이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통근길에 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 곳에 왔다. 쉽게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하루 하루를 보내다보면, 문득 그들과 차 한잔 하면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제나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니까, 하려고만 하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메신저로 인사 한 번 건네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하지만 너무 더디게 나아지는 내 의사소통 능력에 생각이 미치면, 어쩐지 망설여지게 된다. 힘들더라도, 한 마디라도 더 영어로 내 뱉을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시애틀이라는 곳은, 그러니까 미국이라는 곳은 내게 그런 곳이다.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을 생각해 보면, 차마 지금으로서는 회상하기도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문제건 실제로 겪기 전에는 전부 조금씩은 미화되거나,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마련인 것이다. 닥치기 전에는, 그 문제들이 정말로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빠, 긴장되지 않아?"


첫 출근을 준비하던 내게 큰 아이가 물었다. 같은 질문을 지금 다시 한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첫 날보다, 지금 훨씬 더 긴장된다고. 매일 매일 출근을 준비하는 매 분 매 초가, 더욱 더 긴장된다고.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뜰 때 마다, 정말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삼주차 되던 때였나, 새로 부임한 매니저가 내게 새로운 일감을 맡겼다. 한국에서 알고 있던 내 직무와는 사뭇 다른 일거리였다. 물론 당황했다. 업무가 달라져서 만은 아니었다. 그 일을 진행하기 위해 내가 져야만 할 책임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시니어인 만큼 많은 책임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이해해야 해."


그것이 매니저가 내게 새 업무를 지시하면서 충고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덕분에 몇 년 동안 남의 일처럼 바라만 보던 낯선 시스템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게 시애틀이라는 곳은 여러가지 문제가 한 데 뒤섞여 공존하는 어떤 곳이다. 거기에는 나이든 개발자가 경력이 쌓일수록 늘어만 가는 책임과 의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문제가 있고, 이방인으로 시작한 삶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며, 어떤 업무든 주어지면 빠른 시간 안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고, 낯선 삶에 적응해야만 하는 가족의 가장으로서 겪게 되는 삶의 기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매일 아침은 언제나 스탠드 업 미팅으로 시작된다. 아침 여덟시에 오피스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 날 할 일, 어제 했던 일을 정리해야 스탠드 업 미팅에서 입이라도 한 번 시원하게 뗄 수가 있다. 무슨 프리젠테이션도 아닌데, 나는 그 날 아침에 몇 분 남짓 중얼거릴 말들을 준비하느라 한 시간 남짓을 쓴다. 그리고 그 미팅이 끝나면, 나는 무너지듯 자리에 앉아 내가 했던 선택들과, 그 선택들이 이끈 결과들을 바라본다. 


나이를 먹어 좋은 것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난감한 상황들에 비교적 무덤덤해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동료들이 너무나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동료들 덕에, 나는 낙관적인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저 이 큰 회사의 한 동양인일 뿐이다. 내가 하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한다. 내가 느리면, 다른 누군가가 빨라진다. 욕은 좀 먹겠지만, 내가 느리다고 회사 전체가 느려지진 않는다. 


시애틀은 그야말로, 훌륭한 프로그래머의 도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