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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시애틀 (6)

by 이병준 2015. 11. 23.

미국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케아에서 가구를 산다. 굳이 이케아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 가구가 싸기 때문이다. 미국의 물가가 한국과 비교해서 싸다고는 하지만 월세 같은 부분은 분명 가당찮을 정도로 비싼 부분도 있고, 서비스 비용은 비싸기가 악명이 높을 정도이기 때문에 (의료비도 그 중 하나) 다들 절로 허리띠를 졸라매게 되는 곳이 이곳이다. 


이케아의 가구가 저렴한 것은 조립, 배송에 관한 부분을 고객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가구 자체의 품질로 보면 분명 경쟁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런데 그 가구를 힘들게 집으로 실어와 조립을 시작하고 나면... (묵념)


이케아 가구에는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첫 번째는, 매뉴얼을 잘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충 보고 조립에 착수하면, 부룸을 빼먹거나, 엉뚱한 곳에 꽂거나, 자재를 망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조립에 필요한 모든 것은 매뉴얼에 있고, 제대로 숙지하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온전히 고객의 책임이다. 그러니 이케아 가구를 조립할 때는 섣불리 조립부터 시작하는 대신,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깊게 완독한 다음에 덤비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대로 개발을 하고 싶으면 관련 문서를 정독해야 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두 번째 비슷한 점은, 덩치가 작은 가구라고 반드시 조립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침대를 조립하기보다 서랍장 조립하기가 더 어렵다. 덩치가 작은 가구라고 해서 매뉴얼이 더 얇지도 않고, 부품이 더 적지도 않다. 침대 하나를 조립하는 부품들은 달랑 비닐봉지 하나에 포장되어 오지만, 서랍장 하나를 포장하는 데 필요한 부품은 비닐봉지 세 개에 포장되어 온다. 소프트웨어의 복잡성을 단순히 그 규모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나 비슷하다. 


세 번째로 비슷한 점은, 드라이버나 뺀찌 등의 기본 연장이 충실하면 작업 속도가 배로 빨라진다는 것이다. 전동 드릴이 있으면 제대로 조립할 가능성이 높지만, 막 드라이버 하나로 덤비면 밤을 샐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대로 된 공구를 갖추면 일이 편해질 뿐 아니라 작업 시간이 단축된다. 제대로 된 기술과 라이브러리를 갖추고 개발에 착수하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이나 비슷하다. 


네 번째로 비슷한 점은, 제대로 표준화된 인터페이스가 있으면, 모든 작업이 예상 가능한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이케아 가구 조립에 쓰이는 공구와 나사는 거의 전부 표준화되어 있고, 이용 방법이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조립을 거듭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숙련도가 올라간다.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갖춘 컴포넌트를 통해 개발을 진행하다보면 절로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나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점은.... 정작 조립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시발 내가 왜 대체 이 밤 중에 이 짓을'


과 유사한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립 후 완성된 가구를 바라보는 뿌듯함은, 조립과정의 그 모든 괴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오늘 밤에도 삽질에 열중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