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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시애틀 (7)

by 이병준 2016. 10. 1.

시애틀에 온지도 일년이 지났다. 


<screaming>

아니 시발 일년이 지나다니! 벌써 일년이 지나디니! 

</screaming>


시애틀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nonsense>

영어가 안되는 것 말고는 다 비슷하자나? 그래! 개발자가 일하는게 다 거기서 거기지! 아무리 아마존이 빡세다고 해도 한국에서 일했던 것 보다야 낫겠지! 그래 자신감 하나로 밀어 부치는거야! 

</nonsense>


그런 자신감으로 시작했던 아마존 생활은 곧 빈곤한 영어실력에 너덜너덜해지고... (묵념) 


아마 그 시절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소위 시니어 스트레스가 아니었나 싶다. 시니어 개발자는 주니어 개발자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자리임은 물론, 여러 팀 간에 생기는 개발 이슈를 적절하게 조정하는 책임도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 되어야 조정이고 나발이고 해 보지....  썅 


그러나 미국 생활을 처음 해 본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친절히 모든 것을 이해해주었던 동료 개발자들과 매니저 덕분에  바닥이었던 자신감은 하루 하루 조금씩 회복되어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나와 direct report 관계에 있는 시니어 매니저였는데, 내가 시스템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프로젝트를 시의 적절하게 계속 찔러주었음은 물론 (거의 전방위로) 내가 부족한 부분을 2주 단위로 계속 지적해주어, 어디를 개선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삽질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가히 아마존 생활에 있어서의 가장 큰 은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그래도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직전 직장에 비해 과히 힘들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험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10월~2월:

이 시기에는 거의 여섯시 반 기상 일곱시 출근 여덟시 사무실 도착 일곱시 퇴근의 강(?)행군!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해주겠어! 이런 기상으로 넉달을 버텼다. 그러나 그런 기개에도 불구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대놓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기를 여러번...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시발 집에 가고 싶어(갈 집은 있나)를 되뇌었던 날이 도대체 며칠이었던가.... 그러나 굴하지 않고 모든 이슈를 내 힘으로 해결해 보이겠다는 욕심에, 남들에게 묻는 대신 스스로 삽질하며 밤을 지새우기를 여러날...


3월~6월:

그렇게 삽질한 덕분인지 시니어 개발자 답게 팀내에서 생기는 이런 저런 이슈들에 대해 질문대신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역량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 시애틀의 명물 가랑비가 그치고 황금같은 여름 날씨가 찾아온 덕분에 춥고 배고픈 출퇴근길을 졸업한 시기이기도 하다. 회의시간에 오고가는 이야기를 대략 80%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간 삽질에 공헌한 노고를 치하하는 상도 받았다 (Recognition Award 2016). 바닥이었던 자존감이 서서히 회복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괴로움에 치를 떨며 잠못 이루던 시기도 끝나고, 머리만 대면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7월~10월:

무척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던 시기. 어떤 식으로든 모든 팀원을 도와줄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주도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도 생겼고, 마침내는 뭔가를 제안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제안한 프로젝트는 현재 디자인 리뷰 중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을 때 부터 말썽이던 고관절 수술을 받는 사람에 7월 한달간 퍼포먼스는 바닥이었다...


그래, 그렇게 벌써 일년이 지났다. 


그래도 아직까지 끊임없이 묻는다. 대체 나는 왜 여기에 왔으며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가.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미국에 왔을 때 만 해도 그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오만한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그냥 하루 하루 성실하게, 즐거운 일을 해 나가며 버틸 뿐인 것이다...


그래도 시발 on-calld은 정말 버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