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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초능력

by 이병준 2021. 6. 14.

세상의 기대와는 달리, 초능력자들은 대체로 불우한 인생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초능력이라고 하면 하늘을 날고 외계인을 물리치며 약한 자를 수호하는 영웅을 떠올리지만 그렇게 쌈빡한 인생을 사는 초능력자는 많지 않다. 왜냐? 그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쌈빡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클라크 켄트는 하늘을 날고 눈으로는 레이저를 쏴댈 수 있었으며, 피터 파커는 거미줄을 뿜으며 벽을 기어다닐 수 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공간에 낸 구멍으로 어디든 오락가락할 수 있었고 부르스 웨인은 먹고 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돈으로 히어로들을 고용해 지 멋대로 세상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斷초능력모임'에서 만난 23인의 찌질이들은 '오늘도 내 초능력이 나보고 뭐라고 그러오'를 하루종일 뇌까린 얼굴로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신세한탄을 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저주라고 여기며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이었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일동)

- 저는 오늘로 초능력 끊은지 딱 100일이 되었습니다.

- (환호) 

 

斷초능력모임은 보통 이런 식의 간증으로 열리곤 했다. 그날의 모임은 특별했는데, 100일 특별 간증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손님이 있어서였다.

 

- 저를 아는 분들은 저를 '세상에서 가장 딱한 능력자'로 부르곤 하는데요. 

- (웃음)

- 그도 그럴 것이 제게는 시간을 멈출 능력이 있습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저 새끼가 미쳤나, 그런 능력이 저주일 리가 없잖아! 그는 나와 같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내게 시간을 멈출 능력이 생긴다면 나는 프로덕션에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시간을 멈추고 단숨에 버그를 찾아 자랑스럽게 알려주겠어! 모두가 나를 우러러 보겠지! 아니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적용사례만 해도 수십가지가 넘는데 저 자식은 지금 그 능력이 쓸데 없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거야? 아니 그 대가리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한다는 게 말이 돼? 

 

- 네,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분들이 좀 있네요. 이해합니다. 시간을 멈추면 보통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시죠.

 

그리고 순간, 연단 위에 서 있던 그가 사라졌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더 이상 연단 위에 있지 않았다. 아래에 있었다. 

 

- (다시 환호)

-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거의 최대치에 가깝습니다. 

 

그는 다시 연단 위로 올라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모두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 제가 이 능력을 얻은 것은 4년 전입니다. 처음으로 큰 회사에 좋은 자리를 얻어 이직한 때였죠. 아직도 첫 출근하던 날이 생생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서 버스에 올라, 한 시간 정도 걸려서 회사에 도착해 매니저가 될 사람을 처음 만났죠. 같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 팀원들을 만나고 인사를 한 다음, 자리를 받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자리에 앉아 처음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이 기회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 

 

그렇지만 생각보다 일은 쉽지 않았어요. 큰 회사였고, 도처에 깔린 낡은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했고, 조그만 회사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업무 처리 방식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큰 회사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죠. 접할 기회가 없었던 개발 및 프로젝트 관리 방법도 당황스러웠어요. 그런 시간이 몇 달 지나자, 슬슬 저를 바보취급하는게 눈에 보이더군요.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낯선 도시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겨운 것은 가족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그들을 도와줄 기력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열시가 넘으면 다시 책상에 앉아 눈이 빨갛게 될 때 까지 코드를 보고 또 볼 뿐, 다른 일은 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어느날은 그렇게 코드를 되짚고 되짚다보니 코드를 보기 시작했던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제대로 배운 것은 하나도 없는 채로였죠.

 

가족들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일까봐 술도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좀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와인 한병을 들이 부어 마시고는 취한 눈으로 코드를 좀 더 보다가 그대로 엎어져 잠들어 버렸어요. 

 

그러다 졸타를 만났습니다. 졸타 아시죠? 예전 놀이 공원에서 간혹 만날 수 있었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갇힌 기계. 그 기계가 뜬금없이 꿈에 나타나 저에게 묻더군요.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그으억 그으억 기계음을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하고 생각하며 말했죠. '시간을 멈출 능력을 주십시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짱구를 잘 굴려 다른 소원을 빌었어야 했어요. 가령 돈을 듬뿍 달라거나... 그런데 술이 취해 정신이 없었는지 그런 말을 해 버린겁니다. 시간이 많으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겠지! 시간을 멈춰두면 남들이 하루 만에 할 일을 한 달 걸려 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잠에서 깼습니다. 술먹고 헤롱거리다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정말 그 꿈의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더군요. "Your wish is granted"라고 적힌 카드를 받은 것 까지. 네. 그리고 저는 초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시간을 멈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 웃기죠? 여러분이 아는 초능력자 가운데 꿈에서 신령을 만나 능력을 갖게 된 자는 제가 유일할 겁니다. 

 

물론 당일에는 몰랐습니다. 개꿈을 꿨구나 하고 생각했지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리는 당연히 없지 않았겠어요. 

 

그러다가 이상한 장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새벽 두 시 마다 꼭 알람을 울려 온콜 엔지니어들이 잠을 설치게 만드는 이상한 장애였죠. 팀의 유일한 선임 엔지니어로서, 저에게 그 장애를 해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 장애에 대해서 어느 팀도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오직 우리 팀에서 데이터 전송을 담당하는 프로세스만이, 전송 버퍼에 남은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새벽 두시에 알람을 울려대고 있을 뿐이었죠. 심증은 다른 부서의 프로세스 가운데 데이터를 읽는 속도가 너무 느린 놈이 있지 않은가 정도였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무기한으로 온콜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당한 처사였지만 항의하긴 어려웠습니다. 저성과자로 찍혀서 이런 취급을 받는거라면 항의하는 순간 계약이 해지되고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무기한' 트러블슈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 일주일은 낮에는 괜찮았습니다. 밤에 두시쯤에 한번 정도만 잠을 설치면 되는 정도였죠. 그런데 다음주가 되자 상황은 좀 더 안좋아졌습니다. 낮에도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죠. 팀원들이 저를 안스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물어볼 만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물었고,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코드를 봤습니다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로덕션에 생기는 장애라는게 꼭 그것 뿐이겠어요? 수시로 다른 장애도 터졌고, 온콜하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사람이 절로 피폐해지더군요.

 

그러다 그 꿈 생각이 났습니다. 아 잠깐 내가 초능력자였지? 그래 시간을 멈춰두면 알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을테니 그 동안 코드를 보자! It's morphin' time! Bring it on!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멈춘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너무나 당황스러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겁니다. 몇 번이고 시도해봐도,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시간을 멈추는 순간, 시간과 함께 빛도 사라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릅니다. 다만 짐작하는 것은,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빛도 움직임을 멈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빛은 광자이고 우리 눈은 빛을 시신경에 받아들여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멈춰 그 광자의 움직임도 멈춘 것이라면? 그래서 내 눈이 더 이상 아무 빛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시간을 멈추는 순간 세상도 칠흑같은 어둠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라면?

 

네. 저는 시간을 멈출 수 있었고 더 이상의 알람도 울리지 않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스 코드, 대시 보드, 모니터, 메트릭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료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진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무한대의 취침. 간섭받지 않는 취침. 암막 커튼 따위 필요없는 완벽한 암흑 속에서 누리는 칠흑같이 고요한 수면. 아 물론 처음에는 좀 끔찍했죠.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소음도 사라지면, 진짜 희한한 공포가 찾아옵니다. 공간감이 없어지거든요. 내가 어떤 장소에 있다, 이런 지각이 없어집니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에 닿는 어떤 것의 촉각, 그정도죠. 첨에는 이게 너무 무서워서 엄청 허우적 대곤 했습니다. 나 빼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침대에 누워서만 시간을 멈췄습니다. 그랬더니 자려고 눈 감고 있는거랑 너무 비슷한데, 잡스러운 불빛과 소리들만 사라진 것 같은 상태가 되는거에요. 너무 좋았죠.

 

그래서 저는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아무런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마다 발작적으로 잠을 자는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말 너무나 아름답기 짝이 없는 수면,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빛과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그 완벽한 수면은 너무나 중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모르게 수면중독자가 되었죠. 꽤 친근하게 들리시죠? 네, 여러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저는 이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된 이후에 이전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물을 분도 계실 겁니다. 잠을 많이 잔다고 이상한 사람이 될 리 있나요? 잠을 많이 잘 수 있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은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 때나 잘 수 있다는 것은 남들보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 아니에요? 그럼 그 시간을 잘 쓰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아니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그냥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 것 뿐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냥 그 시간은 숙취 걱정 없이 술 마실 수 있는 시간. 다이어트 걱정없이 아무거나 먹어댈 수 있는 시간. 다음날 일 걱정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 뭐 그냥 그런 것이었습니다. 취하면 좀 자고 일어나지 뭐. 살좀 찌면 남들 잘때 운동하면 되지 않겠어?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된 것이죠. 뭔가를 이룰 '시간'이 없어서 인생을 지리멸렬하게 사는 사람은 정작 시간이 많아져도 지리멸렬한 인생을 삽니다. 그것이 저 같은 보통 사람의 숙명이죠. 저는 곧 중독자가 되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바로 자고 일어났으니까요. 

 

그는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잠시 먹먹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우리 모두가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고 웅변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눈이 나와 마주쳤을 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 ... 말씀하세요.

- 그 문제는 결국 해결하셨나요?

- 새벽마다 울리던 알람 말씀이신가요?

- 네.

- 엔지니어시죠?

 

그는 내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 네. 해결했습니다. 그 버퍼의 크기는 우리가 쓰는 웹 서버의 물리적 제약때문에 1.2MB로 맞춰져있었는데, 문제는 주기적으로 그 버퍼에 내보낼 데이터의 크기가 거의 그 정도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상대가 빨리 읽어가지 않을 경우, 그 버퍼에 기록을 시작할 다음 주기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죠. 두 가지 방법을 썼습니다. 하나는 버퍼에 기록될 데이터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도 버퍼에 오버플로가 생기는 경우에는 전송을 강제로 중단시킬 것.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찾아오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행히 오버플로는 생기지 않았고, 모두 만족했죠. 

 

그리고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다시 시간을 멈춰볼까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 이 이상한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운 좋게 그 문제를 해결한 뒤로 제 경력은 꽤 잘 풀렸습니다. 책임감 있는 엔지니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엔지니어, 한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엔지니어, 동료에게 불평하지 않는 엔지니어, 언제나 침착한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입닥치고 온콜'을 장장 한 달 간 견뎌낸 댓가였죠. 그러나 그런 평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었어요. 중독은 결국 정신을 망치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엔지니어에게 온전한 정신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겠어요?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잘 수 있어서 회복이 빠르긴 했습니다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웠죠. 온전히 스스로의 힘 만으로 벗어나야했어요.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 초능력 따위는 필요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가장 필요했던 것은, 성공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었죠. 그 조급함 때문에 섣불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게 되었고, 전혀 도움 안되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더 좌절하게 되었고, 결국 중독자가 되었으니까요. 인정받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정을 추구하는 것이 옳을까? 저는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스스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산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정말로 가지고 싶어하는 초능력이 아닐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고, 그는 박수와 함께 퇴장했다. 나를 포함한 23인의 찌질이들도 그날만큼은 어울리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아마 그의 이야기가 준 어떤 울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도무지 활용가치가 없어보이는 초능력에서 인생을 바꾼 교훈을 얻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보다 백배는 더 쓸데없어 보이는 내 능력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21년 6월 14일 마지막으로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