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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우연의 음악

by 이병준 2021. 9. 6.

이야기가 길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선생님 말고 예약된 환자분이 없으니 그냥 편하게 말씀드리도록 할께요.

 

The music of chance (1993)

 

제가 알던 분 가운데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손은 귀하지만 굉장히 유복한 집안의 외손자로 태어난 분이었죠. 그 분 외가가 어느 정도로 손이 귀했냐면 제사를 지내면 옆으로는 오는 분이 없어요. 위아래 직계존비속으로 딱 3대만 모이면 끝. 그 정도로 손이 귀한 집안이었죠. 그런데 돈은 많았어요. 어느 정도로 많았냐면 그 당시에 그 집을 찾으려면 대연동 가운데에 티비 안테나 있는 기와집. 거기로 와라. 이런 식으로 안내가 가능할 정도로 많았어요. 사업을 하셨다는데 무슨 사업인지는 모르겠어요. 집안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데 좀 수상하죠.

 

아무튼 손이 귀한 탓에 아들 며느리는 일찍부터 들였나봐요. 그 며느리가 스무살에 시집와서 딸 둘을 거푸 낳고 온갖 시집살이를 다 하다가 기어코 아들을 낳은 후에 아쉬워서 하나 더 낳은 딸이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그 분의 어머니에요. 이 분은 막내딸인데다 장손과 연년생이라 패키지로 귀여움을 받았는데, 집이 부자인데다 무차별적 사랑을 받고 크다보니 뭔가 아쉬운 성격의 소유자가 된 채로 성장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성격이 어쨌던, 돈이 없는 집도 아닌데 고등교육은 받아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분은 고 1때부터 입주 과외 교사로부터 전 과목 지도를 받았어요. 그러다가 오늘 이야기할 이 분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순수한 선생과 학생으로 시작했던 이 관계는 학생이 서울에 위치한 모 여대에 진학하면서 잠시 중단되는 듯 했다가 선생이 여의도 소재 대기업의 신입사원이 되면서 다시 이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런 케이스는 어디 소설에나 나오는거 아닌가 했는데 정말로 있긴 있더라구.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성격이 좀 아쉽다곤 해도 크게 하자 없는 부자집 막내딸이 가진 것이라고는 대기업 사원 타이틀밖에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이. 또래의 대딩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재미삼아 연애나 해 보는거면 또 모를까. 사실 저도 그게 궁금했는데 하필 그때 그 어머님 쪽 집안 재산이 3/4 가량 공중분해 되었다고 해요. 그 바람에 일단 이 남자라도 잡아야겠다... 이렇게 된 것이죠. 서론이 좀 길긴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분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게 된 그분은 어렸을 때 부터 총기와 집중력이 남달랐어요. 가르쳐준 사람이 없는데 글을 깨우치고, 한번 꽂히면 어떤 책이건 덮을 때 까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 끈기가 있었죠. 그래서  온 집안의 총애, 특히 외가의 사랑을 받아요. 많은 것을 가졌다가 망한 집안에는 특징이 있는데, the one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죠. 언젠가는 the one이 나타나 이 집안을 다시 일으킬 것이야! 이런 기대 말이에요. 그래서 어머니 만큼이나 그 분도 무차별적인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아무 문제 없는 모범생으로 성장합니다. 언제까지? 드디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의 학부생 타이틀을 달고 마는 그 순간까지.

 

그때까지 그분은 95%의 모범생이었어요. 그러니까 모범생을 모아놓고 그들을 정규분포 그래프로 표현할 경우 오차범위 5% 선을 벗어나지 않을 아주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단 소리죠. 그러나 이 아이에게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 안방 장롱에서 도색잡지를 발견하는 바람에 생긴 도착증이 하나요, 목을 메어 자살한 외조부의 시신에 관한 이야기를 잠결에 듣게 된 뒤로 생긴 불면증이 둘이요, 동급생 무리에게 집단으로 얻어맞은 후에 생긴 분노조절장애가 셋이요, 그리고 부모가 이혼한 뒤에 생긴 불안장애까지 넷. 

 

신기하게도 그는 모범생으로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이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요. 한 번은 제가 물었죠.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 같으냐고. 그가 그러더군요. 모범생이 되기를 그만두면 곧바로 인생이 망가지고 말거라는 불안,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치르게 될 비용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굉장히 계산적인 사람이었죠.

 

어쨌거나 그가 이렇게 불안으로 또는 이런 저런 계산으로 억누르던 자아는 대학 진학 후에 갑자기 각성하여 그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도착증은 그가 성적 욕구 이외의 어떤 것에도 완전하게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불면증은 그를 술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분노조절장애는 취한 그가 이런 저런 싸움에 휘말리도록 만들었고, 불안장애는 그가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했죠.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대학 진학까지 유지했던 모범생 스탠스가 모종의 관성으로 작용했다는 거였어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는 기적적으로 4년만에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인생의 다음 경로를 정하지 못했어요.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니 어떤 결정이건 쉬웠을 리가 없지요. 대신 그는 모든 것을 미루는 쪽을 택해요. 사시를 보겠다고 선언해 버린 거죠. 아니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라니! 그러나 그는 반대는 커녕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고시생이 됩니다. 어떻게? 모두가 기다렸던 겁니다. 그가 집안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the one으로 거듭나기를! 결국 그는 친가 외가 모든 식구가 조금씩 모은 돈을 매월 지원받으며, 똑같은 하숙집에서 대학 때와 다름 없는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가끔 눈치껏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과외교습이나 뛰어 주면서요. 

 

그럼 그렇게 시작된 고시생 생활은 순조로왔을까요? 나름대로는요. 학원도 다니는 법 없었고, 참고서를 사는 법도 없었으며, 법전을 뒤적이는 일도 없었지만, 그는 하루를 때우는 방법을 잘 알았습니다. 불면증 환자가 제정신으로 살려면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잘 알아야 했어요. 그에게는 이런 저런 취미가 많았습니다. 하나에 심드렁해지면 곧 다음 취미를 찾아 넘어가곤 했죠. 가령 그는 586 PC를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순전히 시간 때우기 용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는 삼국지였어요. 그는 그 게임을 숫자 키패드가 고장날 정도로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 한편으로는 이런 불안이 있었나봐요. 이렇게 좋은 컴퓨터의 키보드를 딱 이렇게 17개 키만 써도 되는걸까? 한때의 모범생 답게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냅니다.

 

바로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PC 통신은 그와 같은 불면증 환자에게는 별천지였습니다. 밤을 잊은 그대들이 모여 밤새 영퀴와 헐퀴를 풀며 시간을 때우던 그 시절, 그는 전화비를 내기 위해 전보다 많은 과외 교습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낭비하기에 그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죠. 그는 그렇게 1년 넘는 시간을 천리안과 함께 보냅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곳은 영화 동호회와 타자게임방, 그리고 채팅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채팅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생들이 으레 그렇듯, 그도 그곳에서 한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성은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온라인에서 상대가 마음에 들면 결국 오프라인에서도 접속하고 마는 것이 그 바닥의 관습헌법이잖아요? 그러나 이 여성은 실로 오랫동안 그 친구와 만나기를 거부해요. 이유를 물어도 시원하게 말해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죠. 그녀와 영퀴, 헐퀴를 풀며 참으로 끈질기게 같은 채팅방에 머물렀죠. 짐짓 무관심을 가장해 보기도 하고, 행여 질투를 유발하는 효과라도 있을까 싶어 다른 여성에게 눈길을 주어보기도 하고. 몇달을 그렇게 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느냐. 그랬더니 말을 하지 않아요. 그 부분은 말을 할 수가 없대요. 그래서 더 묻진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가진 도착증과 어떤 연관이 있는게 아닌가... 뭐 그정도 짐작만 하고 말았죠.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그녀가 1:1 채팅방을 열더니 그를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온라인의 관계가 현실로 확장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당연히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을 못 합니다. 그러고 있으니 그녀가 대신 대답을 합니다. 현실에서도 두 발로 멀쩡하게 서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당신 뿐 아니라 누구도 만날 수 없다.그래서 그는 물었습니다. 그럼 내가 멀쩡한 인간이 되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느냐. 그러더니 그녀가 한숨을 폭 내 쉬더니 말합니다. "나 사실 남자야." 

 

그 길로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뽑고 고시공부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고시촌 전체로 보면 작은 한 걸음일 뿐이었으나 그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일보였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삼년만에 그는 고시촌 탈출에 성공합니다. 

 

고시촌을 벗어난 후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뻔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을 챙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성공하였지만 무료한 삶은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무료함은 성공이 주는 훈장 같은 것이지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살기 바빠서 무료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중년이 되고 일이 줄어들었을 때 상실감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일이 곧 자아가 된 인생을 살았는데, 그것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것이지요. 그럼 그 남은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서나요? 공허함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은 좀 달라요. 특히 젊어서 성공한 사람은 좀 다릅니다. 할 일은 많은데 다 너무 익숙해요. 그냥 눈감고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버렸어요. 일상에 도전이 없는데 먹고 사는건 풍요로운거야. 그러니 지루한거죠. 무료해지는거에요. 

 

그렇게 무료한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 밀기 시작합니다. 아까 그분께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했었죠? 도착증, 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 등등 있었잖아요? 그런게 어느날 아침 눈뜨자마 마자 다 한꺼번에 찾아온 거에요. 그래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지경이 된 겁니다. 그걸 아침마다 한 일주일 반복하고 나서 이 분이 결국 안되겠다 싶어서 나한테 온 거에요. 오더니 본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 다 털어놓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치료를 했습니까? 그분의 무의식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치료를 했어요. 무의식의 심연을 내려가다보면, 우리에게 지극한 만족을 주었던 어떤 것, 가장 근원적인 만족감을 주었던 어떤 것, 우리 정신을 트라우마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자유를 주는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선생님께서 그런 무엇을 발견하셨다고 칩시다. 선생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한가지는 확실해져요.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이 피상적인 가치이고 어떤 것이 좀 더 본질적인 가치인지 조금은 더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저는 그 분도 그것을 발견해야 그 모든 강박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을거라고 봤어요.

 

그럼 그 분은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음악이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거덜난 그 분 외가에는 값 비싼 전축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부자는 순식간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거실 한쪽에 놓인 전축과 턴테이블이었죠. 그분의 외조부는 오페라 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여름방학에는 어김없이 푸치니를 들어야만 했어요. 즐거운 경험이었을까요? 처음엔 아니었댑니다. 하긴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부르는 아리아가 꼬맹이에게 뭐 그리 유쾌했겠어요. 그러나 그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 곡조 하나하나에 연결된 감정을 전해듣고 난 뒤, 소년은 점차로 그 음악에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를 상상해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해받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그 음악, 그리고 그 이야기가 소년에게는 완벽한 휴식이었던 것이죠. 거기까지 내려가는데 대략 6개월 정도 걸렸는데, 그러자 그 분을 옭아맸던 네 가지 증상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날부터 그분이 저를 화타라고 불러요. 신의라는 거죠. 그리고 나서 아무 일이 없어도 매달 한 번은 선물 들고 찾아오는 아주 반가운 손님이 됩니다. 

 

그러다 하루는 아주 훌륭한 오디오를 장만했다면서 와인을 사 놓고 저를 초대를 해요. 가 보니까 씨디 스무장을 한 번에 꽂아놓을 수 있는 플레이어와 LP 턴테이블, 초대형 티비 등이 갖춰진 그럴싸한 AV 룸을 장만해놨어요. 그리고 나서 본인이 어렸을 적 들었다는 아리아를 비디오와 함께 틀어줍디다. 음악에 아무 관심이 없는 나도 절로 감탄하게 되는 음질이더군요. 제가 물었죠. 돈 좀 쓰셨겠다. 그랬더니 엉뚱한 답을 해요. 요즘은 여기 너무 오래 머물러서 탈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부인이 싫어하시겠다. 그랬더니 씨익 웃으며 말합니다. 내가 인생을 더 이상 무료해하지 않으니 그 사람도 좋아해요. 

 

행복한 결말이죠. 

 

그런데 선생님,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 분이 지난달 돌아가셨습니다. 그 방에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탓이었을까, 다리에 혈전이 생겼고, 그게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막은 게 원인이었다고 해요. 정말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죠. 그 죽음, 그리고 그 분의 삶을 돌이켜보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인생을 강물로 본다면 그 강물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 가운데 우연 아닌 것이 있는가. 그러니 그 흐름을 내 의지로 막고 돌리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큰 장애를 일으켜 마음이 너무 안좋고 괴롭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지 마세요. 님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하필 그 때 그런 코드를 만든 것, 장애를 일으킨 것, 그리고 시말서를 쓴 것, 그리고 제가 선생님께 이렇게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 그 모두가 몇달 뒤에 보면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에 연연하지 마세요. 바로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의 의미에 너무 얽메이지 마세요. 오늘의 심상은 시간이 지나면 낡습니다. 어제 명쾌했던 깨달음은 오늘 더이상 사실이 아닐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 괴롭다고 내일도 그럴거라 단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그 분이 받았던 그 무의식 치료.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허 참 이 친구,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장애를 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