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oughts

Day of the living dead

by 이병준 2022. 12. 21.

신경학적으로 보자면 좀비가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기전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순간 기억 중추를 비롯한 대뇌 대부분이 동작을 멈추고 운동 능력에 관계된 부분만이 제대로 동작한다. 이 때 해당 부분의 효율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일부 좀비는 단거리 육상 선수를 능가하는 스피드로 달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좀비는 여기 저기 부딛혀 제풀에 운동능력을 상실하기도 하고 증가된 운동능력을 감당하지 못한 육신이 스스로 망가져버리는 탓에 끝이 좋지 않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은 과연 무엇이 '운동능력만 남은 육신으로 하여금 산 자의 피와 살을 탐하게 만드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가설을 내 놓았으나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사실로 입증되지 못한 가운데, 한 뇌과학자의 실험 결과가 많은 이의 눈길을 끌었다. 제 1차 판데믹 때 아내를 잃은 그는, 아내의 뇌에서 나오는 전기신호를 분석하여 기억 유지를 담당하는 피질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기능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오직 한 부분 만큼은 종전 대비 70% 수준의 기능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 사실을 많은 좀비의 두뇌 샘플을 분석하여 입증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비정상적으로 항진된 인육에의 탐욕과 무슨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추후 동물 실험을 통해 두뇌 피질에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비슷한 자극을 가하면 특정 탐욕이 비슷한 정도로 항진되는 것을 확인한 후, 결국 많은 과학자가 인간 대뇌의 바로 그 부분이 좀비로 하여금 인육을 먹도록 유도한다는 결론을 내리게끔 되었다. 다만 문제는, 같은 종의 피와 살에 집착을 보인 건 오직 인간뿐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문제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아들을 쇠사슬에 묶고 방에 가둔지도 1년이 지났다. 인간의 육신이 아닌 무엇 가운데 유일하게 좀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것은 갓 도려낸 돼지의 허벅지살. 단 1년만에 나의 후각은 오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정육점의 재고 상황까지도 어림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동물 살코기로는 오래 잠재울 수 있는 허기가 아니었다. 새벽 네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쇠사슬 끄는 소리. 그리고 응당 썩어버렸어야 마땅한 위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신음소리. 그 신음 소리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아직 채 사멸하지 않은 내 아들의 육신이 내뱉는 소리임에랴. 

 

어떻게든 그 신음소리를 멈추고 싶었다. 그 허기만 영원히 달랠 수 있다면, 설사 좀비 상태의 아들이라도 견디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의사들이나 봄직한 저널을 정기구독하고 최신 연구 성과를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견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15초 가량이 경과하여 대뇌의 모든 부분이 좀비의 그것으로 변할 때 관측되는 마지막 발작이 극도의 쾌감을 경험하였을 때 신체가 보이는 반응과 지극히 유사하다는 연구였다. 해당 연구를 인용한 다른 논문에 언급된 통계에 따르면, 그 마지막 단말마의 시점에 사정과 유사한 신체 반응을 보이는 남성 좀비의 비율은 대략 10%에 달했다. 10%라면 전혀 무시할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생리적으로 다른 인간을 탐욕하게 되어 있다. 다만 생존에 걸맞을 수준으로 그 탐욕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좀비 바이러스는 그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시키고, 그 탐욕을 물리적으로 실현할 도구만 남긴다. 그렇다면 좀비는 결국 어떤 존재인가. 오직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물론 내가 원했던 결론은 아니었다.

 

아들을 가둔 방의 문을 열자, 오직 내 피와 살만을 원하는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은 온통 칠흙의 심연일 뿐, 한 때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 흔적, 한 때 나의 아들로서 행복했던 자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저것은 기계일 뿐이다.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사라지고 온전히 탐욕만 남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기계일 뿐이다. 기계는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것이고, 스위치를 내리면 그 뿐이다. 저것은 내 아들이 아니다. 기계의 스위치를 끄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한편으로 나는 느끼고 있었다. 아들을 기계로 치부하더라도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들이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 한 남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던 날의 뿌듯함, 그리고 내가 부모로서 저지른 모든 실수들을 용서해 주던 날의 감격. 그런 것들은 설사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단순히 기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사라지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등졌다고 그 자식의 사진첩을 불태우는 부모가 있던가. 

 

그러니 유일한 해결책은 내 손목을 내어주는 것 뿐이었다. 

 

피부, 혈관, 근육 곳곳에서 상상하지 못한 고통이 느껴졌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를 인간이게 했던 모든 것들이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거 과정을 보는 나 자신도, 끝내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불현듯, 아이의 탯줄을 자른 뒤 아내의 손을 잡고 '수고했어'라고 속삭이던 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 때는 여름이었던가,

아니면